프라다는 미우치아 프라다 부터 시작된게 아닌걸 아시나요?
버버리, 에르메스 등 나올때 프라다도 오픈 했다고 하네요. 왕가의 로고 까지 받았던 프라다는 잠시 정체기가 있는데요.
지금의 프라다가 있기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프라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출처:m.blog.daum.net:qwertcc:158

1913년 마리오 프라다(미우치아 프라다의 할아버지)가 밀라노에 있는 '프라텔리 프라다'라는 매장을 내면서 시작 되었습니다.
1919년에는 이탈리아 왕실에 가방을 납품하는 공식 브랜드로 지정되어 왕가의 로고 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프라다는 내리막을 달리며 그의 아들들은 사업을 물려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마리오 프라다는 딸이 물려받고 지금의 프라다는 1971년 그녀의 손녀인 미우치아 프라다가 물려받게 됩니다.


포코노 백
출처:romabike.eurobike.kr

미우치아 프라다는 1949년 생으로 밀라노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였습니다.
하지만 가업의 위기로 그녀는 액세서리 디자인을 시작으로 비즈니스에 뛰어듭니다.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아이디어는 참신했습니다.지금의 나일론 소재로 만든 백이 유명해졌을리라 누가 상상했습니까?
나일론으로 만든 프라다 '포코노백'은 가볍고 견고해 커이어우먼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프라다 부부(왼)파트리치오 베르텔리(오)마우치아 프라다
출처:cluster1.cafe.daum.net

그녀가 지금의 현재 CEO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명품 프라다는 없었을것입니다.
이 둘의 만남은 어땠을까요?
프라다는 국제가죽박람회에서 파트리치오 베르텔리가 프라다 모조품을 만들어 팔다가 만났다고 합니다.
미우치아는 그에게 화를 냈지만 그는 사업확장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쁜 첫 인상이었지만 같이 사업을 하게 되었고 부부의 연까지 맺게 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한 부분
출처:richwang.tistory.com

출처:nusmag.com
나일론 가방 후 튀지않는 색상, 디자인, 실루엣 심플함을 유지한 여성복 라인을 만들어 인기를 얻은 후 2번째 브랜드 미우미우를 만들어 냅니다.
미우미우는 1996년 디카프리오가 나온 '로미오와 줄리엣'에 의상을 담당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미우미우는 1992년 프라다보다 낮은 가격으로 젊은 여성 타겟으로 한 브랜드 입니다.
같은해에 프라다의 나일론 백팩의 부활. 1997년에는 프라다 스포츠라인. 정장에 운동화를 신어 지금 현재 정장에 운동화 컨셉이 지속 되는건 아닐까요?


출처:siegblog.com

명품 사냥꾼 베르나르 아르도에게 구찌를 비싼 값에 팔아 넘기고 그 덕에 LVMH와 PPR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프라다는 구찌 외에도 여러브랜드를 인수 매각하면서 엄청난 수익을 챙겨 LVMH와 PPR 그룹에 이어 세계 패션 업계에서 세번째 규모 명품 그룹으로 성장했습니다.



출처:zine.istyle24.com
우리나라에도 한때 프라다의 모조품이 많이 있었죠? 지금도 몇몇 가판대에서 판매하는걸 보기도 했는데요.
세계적인 경제불황과 나일론백의 인기하락.
모조품으로 프라다는 침체기를 맞습니다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 합니다.
2000년대가 되자 프라다는 패션 외에도 건축. 세계적 건축가 쿨하스와 함께 1999년 뉴욕 프라다 매장 에피센터를 시작으로 프라다는 패션에 건축을 접목시킨 트랜스포머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2009년 서울 경희궁에서 펄쳐진 트랜스포머 전시회는 원, 십자, 육각형,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시회장 자체가 다양한 모양으로 바뀌는 신개념 건축이었습니다.


도쿄 에피센터
출처:www.design.co.kr

경희궁 트랜스포머 전시회
출처:www.design.co.kr

이렇듯 프라다는 다른 명품과 달리 건축물 사업도 확장 시키고 있습니다.
그녀의 반쪽 파트리치오 베를텔리의 만남이 지금의 명성을 유지하는 가장 큰 요소가 아닐까요?
전 이 부부를 보면 인연이라는게 정말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른다는 말이 정말 맞는말 같습니다. 여러분의 반쪽은 찾으셨나요? 처음엔 악연으로 만나도 나중엔 부부가 된 이들처럼 여러분도 주위를 잘 살펴 보세요.
진주 같은 사람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깐요. ^^

참조: 패션탄생, 구글,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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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로렌
출처:랄프로렌홈페이지

1939년 10월 14일 뉴욕. 유태계 러시아 이민자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원래 성은 리프쉬츠였지만 16세 때 형인 제리를 따라 성을 로렌으로 바꿨습니다.
아버지는 페인트공이었고, 로렌은 뉴욕 양키즈 선수들을 숭배하는 길거리 야구를 즐기는 소년이었습니다.

뉴욕시립대학에 진학, 경영학을 공부하다 2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군 제대 후 남성복 회사인 브룩스 브라더스에 영업사원으로 취업합니다.
일하면서 로렌은 자신이 넥타이를 만들어보기로 합니다.
당시엔 고급스런 원단에 폭이 좁은 넥타이가 다반사였는데, 그는 고급스런 원단에 화려한 패턴을 넣어 11cm가량의 넓은 폭 넥타이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그의 넥타이를 꺼렸지만, 1967년 디자인을 상품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디자인 외에도 생산감독, 포장, 판매까지 도맡았고 1969년엔 폴로 라벨을 부착한 랄프로렌의 넥타이가 ‘블루밍 데일 백화점'에 입점하게 됩니다.
그가 만든 '와이드 타이'는 큰 인기를 얻고 상류 사회의 상징이 되기 까지합니다.

넥타이 성공으로 랄프로렌은 브룩스 브라더스의 사장인 노먼 힐튼의 지원을 받고 회사를 차립니다.
넥타이 후엔 남성복 라인을 론칭. 남성복 라인의 대성공으로 로렌은 1970년 코티 어워드에서 수상을 합니다.
그 후엔 여성복 라인. 이때 폴로선수 로고가 탄생합니다.


(왼)폴로로고 (오)메시 셔츠
출처:(왼)구글이미지 (오)g마켓

1972년 폴로 메시 셔츠. 24가지 색상으로 출시되어 이때 부터 폴로로고를 가슴 부위에 새기기 시작합니다.
이 셔츠 출시로 클래식 아이템 주자로 올라서게 되는데, 영화 의상협찬 후에 랄프로렌의 입지를 확실히 자리매김합니다.
배우들이 모두 폴로를 입고 등장한 두 영화 '위대한 개츠비''애니 홀' 그 시대의 트렌드가 되어버립니다.


웨스턴 웨어(현재)
출처:랄프로렌홈페이지

자신의 디자인에 미국인 전통적인 감각을 가미 하여 1978년에는 웨스턴 웨어 - 미국 서부 원주민과 카우보이 스타일.
1981년에는 인디언의 전통적 요소들을 도입한 산타페 컬렉션을 선보입니다.
1978년엔 아동복 분야. 폴로보이즈와 폴로 걸즈 폴로 컨셉그대로 클래식 고급 아동복을 선보였습니다.
1980년대 랄프로렌은 홈 컬렉션, 페인트 등 다방면으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1993년엔 폴로 스포츠. 1996년엔 폴로 진. 청바지 사업.

그 외에도 계속 해서 사업을 확장해나갑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업을 하면 그만큼 엄청난 수입을 얻었겠죠?
그는 많은 돈을 벌인만큼 기부도 많이 했습니다.



출처:fashion biz

언제나 위기는 찾아오는법.
1997년 주가가 33달러에서 16달러로 떨어 졌지만, 랄프 로렌은 로저 파라를 최고 운영 책임자로 영입하고 체계적인 경영 시스템을 도입해 2002년에서 2007년 5년만에 순이익이 2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2007년엔 리치몬드 그룹과 랄프로렌워치 앤드 주얼리 컴퍼니를 설립하여 고급시계, 주얼리의 디자인, 개발, 생산 및 유통을 하고 있습니다.
랄프로렌은 미국 패션 디자이너 중 최후의 생존자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왜나구요? 경쟁 관계였던 캘빈 클라인은 2003년 회사를 매각하고 디자인고문에 물러났고, 토미 힐피커 역시 사모펀드 소유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도산공원 앞 랄프로렌 플래그십스토어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플래그십 스토어'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리키백
출처:(위) www.imagazinekorea.com:luxury (아)firstlook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큰 매장이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도쿄 오모테산도 플래그십 스토어 다음으로 도산공원 앞에 랄프 로렌 플래그십 스토어가 있습니다.
실내는 디자이너 랄프로렌이 실제 거주하는 집의 인테리어 컨셉에 영감 받아 꾸몄고, 1,2층엔 여성복인 블랙 라벨과 블루라벨, 액세서리. 지하엔 남성복 중 최고가인 퍼플 라벨을 만날 수 있습니다.
퍼플 라벨 살롱에서만 서비스되는 남성용 맞춤 수트라인인 '메인드 투 메저' 서비스를 통해 영국 새빌 못지 않는 양복을 맞출 수 있다고 합니다.
리키백 역시 원하는 컬러와 소재로 주문 제작이 가능 합니다.


<남성복>
POLO by RALPH LAUREN- 영국식 트랜디셜리즘을 미국적인 스타일로 변형 시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폴로의 대표 브랜드
POLO SPORT- 액티브한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한 스포츠 라인
PRL- 빈티지한 워크웨어 스타일로 캐릭터 브랜드
PURPLE LABEL- 고가의 남성 정장 라인

<여성복>
RALPH RAUREN- 폴로의 트러디셔날 여성라인으로 고품격 캐주얼 라인
RALPH LAUREN SPORT- 캐주얼하고 이지한 스타일의 여성 라인
BLACK LABEL- 귀족적인 고품격 고가의 여성복 라인

<남녀 공용>
POLO GOLF- 폴로의 골프웨어 라인으로 프로페셔날 골퍼들에 의해 그 기능성이 입증
RLX- 익스트림 스포츠를 위한 하이테크 스포츠웨어 라인
LAUREN- 실용적이면서 고급스러운 합리적인 가격대인 정장 라인
POLO JEANS- 젊은층을 위한 폴로의 진브랜드

참조: http://blog.naver.com/jon0107/120131813874, 패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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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blog.naver.com/embrasse7880

EIDF 2014년 작품 중 "칼 라거펠트: 인생을 그리다.”를 보았습니다. 약 50분 가량의 다큐멘터리로 PD가 질문하면 칼 라거펠트가 직접 그림을 그려주면서 설명해주는 형식입니다.
그의 어린시절 집부터 그의 작품, 뮤즈 등 다양한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를 나누는데요. 전 이 다큐를 보며 역시 디자이너 그림 실력은 다르구나 라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선 하나 하나 구도 하나 하나 신경 쓰는 화가와 달리 거침 없이 펜으로 그리는데 정말 감탄의 연속 이었습니다. 칼 라거펠트 그림 중 독특한 점도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아이셰도로 보이는 화장품을 사용하는 장면 인데요. 그는 샤넬과 슈에무라 화장품을 사용 한다고 합니다.


그의 이야기 중 칼 라거펠트 금기어록에 나오는 몇가지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술과 담배 마약은 하지 않지만 그걸 즐기는 사람을 좋아한다. 자신이 그러지 못하는 일이라 존경스럽다’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 ‘너는 나를 닮았어. 나보단 좀 못하지만’ 금기 어록을 먼저 읽고 다큐를 보니 칼 라거펠트에 대해 좀 더 친근감일 느껴졌습니다. 중복학습이라는게 그런거겠죠?


(왼) 린다 에반젤리스타 (오)클라우디아 쉬퍼 출처:(왼)prologue.blog.naver.com (오)sporer.tistory

그의 뮤즈였던 린다 에반젤리스타, 클라우디아 쉬퍼.


(왼)사스키아 드 브로우 (중)안야루빅 (오)프레야 바헤 출처:(왼)lovexpeace.egloos. (중)blog.daum.net:ladymarmalade93 (오)sporer.tistory

현재의 뮤즈 사스키아 드 브로우, 안야루빅, 프레야 바헤. 남자 뮤즈는 브래드 크로닉. 그의 대부이기도한 칼 라거펠트. 브래드 크로닉 아들인 허드슨 코에닝. 패션쇼에 나올만큼 패션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합니다. 대부도 아무에게나 해주는게 아닌가봅니다. 이렇듯 칼 라거펠트가 지금까지 살아온 순간 순간을 알 수 있어 전체적인 칼 라거펠트의 삶을 알 수 있습니다.


브래드 크로닉과 그의 아들 허드슨 코에닝 출처:엘르. sn@pp

칼 라거펠트의 거침 없는 드로잉과 말솜씨로 50분간의 다큐는 정말 짧게 느껴 졌습니다.
샤넬의 수석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에 대해 알고 싶다면 꼭 이 다큐를 보시길 바랍니다. ^^


출처:eidfblog티스토리

샤넬이 있어서 칼 라거펠트가 있는걸까요? 아님 칼 라거펠트가 있었기에 샤넬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걸까요?
샤넬에 대한 정보를 더 알고 싶으시다면 아래 샤넬 로고를 클릭!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샤넬'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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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강하다. 크리스찬 디올
프랑스에서 샤넬을 한물가게한 ‘뉴룩’ 그건 무엇이었을까요? 크리스찬 디올(=크리스티앙 디오르)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크리스찬 디올
출처:(왼)구글 이미지 (오른쪽)yunkyung.egloos

1905년. 5남매중 둘째로 프랑스 노르망디에 부유한 자제 였습니다. 풍요로운 생활속에 그는 건축가가 꿈꾸며 미술관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건축가를 반대 하셨고, 결국 1920년 정치학과에 입학 합니다. 유명인은 늘 뭔가 해도 다르다죠? 대학생활은 뒷전. 예술가들 모임과 펍과 갤러리를 드나들었고 결국 부모님도 디올의 의견을 어느정도 받아 드립니다. 그래서 디올의 아버지는 갤러리를 열어줍니다. 다른 명품 디자이너들과 스케일이 다르군요.


(왼)피에르 발맹 (오른쪽)지방시
출처:(왼)lifebasics.me (오른쪽)mezis.co.kr

하지만, 1931년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갤러리를 닫고 자신의 장점을 살려 오트 쿠튀르 숍에 드레스나 모자 일러스트를 그려 돈을 벌기 시작합니다. 그의 실력은 금새 알려지고, 1938년 로버트 피제의 부티크에서 보조 디자이너 일을 시작합니다.

명품가들이 다 겪는 2차세계대전.
이 때 샤넬은 독일 나치 장교 덕에 무사히 2차세계대전을 보내지만, 디올은 어땠을까요? (샤넬은 어떻게 2차세계대전을 안정하게 보냈을까요? 밑의 샤넬 로고 클릭!) 그는 전쟁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장이 나왔기 때문이죠. 그래서 2년간 전쟁에 참전했고, 여동생도 잃게 됩니다.(그 전에 형도 사망) 1941년 전쟁 후엔 루시앵 를롱의 부티크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는 피에르 발맹, 지방시와 같이 보조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아갑니다.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샤넬'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왼)뉴룩 (오른쪽)디올이 디자인한 다양한 라인
출처:(왼)yunkyung.egloos.23 (오른쪽)fashionjjj.egloos

노력가에게 찾아온 행운. 디올의 친구가 당시 섬유 업계의 왕으로 불리던 마르셀 부삭을 소개 해줍니다. 마르셀 부삭의 원단과 디올의 디자인이 합쳐져 1946년 파리 몽테뉴 30번가에 첫 오트 쿠튀르 하우스 크리스찬 디올을 오픈합니다. 전쟁전엔 샤넬의 인기 였지만 전쟁 후엔 샤넬의 명성은 떨어졌고, 1947년 2월 12일 디올의 첫 컬렉션이 열립니다. 여기서 선 보인 것이 ‘뉴룩’ 원래 이름은 ‘꽃부리-Corolle’는 파격적이었습니다. 이 옷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평소 그녀가 좋아했던 꽃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지닌 물망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당시엔 코르셋이 필요없는 샤넬 처럼 군복 같은 남성스런 옷, 유니폼이 많았는데 디올의 옷은 꽃잎처럼 펼쳐진 스커트와 다시 잘록해진 허리라인으로 여자의 여성스러움을 한껏 더했던 것입니다. 뉴룩은 엄청난 사랑을 받습니다.

그 중에서 영국의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영국 왕실에선 사치 조장을 막기 위해 의상 소비량을 제한 했는데, 공주들이 뉴룩에 반해 비밀리에 국왕이 디올을 부르기까지 합니다. 1947년 '뉴 룩'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제1회 파리 컬렉션에서 1급 디자이너로 인정받고, 이후 H라인, A라인, Y라인 등 알파벳 라인과 튤립라인, 애로우 라인, 펜슬 스커트 등 다양한 새로운 디자인으로 패션계에서 주목 받습니다.



(왼)미스디올 오리지날(오 드 뚜왈렛 오리지널) (오른쪽)재탄생된 미스디올
출처:(왼)구글 이미지 (오른쪽)cswomen.cn (아래)구글 이미지

"저는 모든 여성이 만족 할 수 있는 향을 선사하고, 향수를 뿌릴 때 마다 디올의 드레스를 입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한 향수를 만들고 싶었습니다.”라고 디올은 말했습니다. 첫 번째로 탄생한 향수 ‘미스디올’ 갈바니움과 쟈스민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그린 시프레 계열향. 여동생을 그리워하며 만들었다는 향수라고 합니다. 이처럼 크리스찬 디올의 작품은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은 미스디올 오리지날 (오 드 뚜왈렛 오리지널)로 판매되며, 현재는 미스디올 이름을 딴 4가지 향수가 재탄생했습니다. 그는 오뜨 꾸뚜르 뿐만 아니라 프레타 포르테, 영화 의상 등 다방면에 작업하며 프랑스 패션계를 장악합니다. 당시 그의 라이벌은 옛날에 같이 보조 디자이너를 했던 피에르 발맹과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였다고 합니다.
명품에서 자주 나오는 '오뜨 꾸뜨르'와 '프레타 포르테'는 도대체 뭘까요?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오뜨 꾸뜨르'와 '프레타 포르테'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매사에 대담할거 같았던 디올은 미신에 집착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는 단골 타로 카드 점쟁이 집까지 있었다고 하는데요. 쇼를 하기전에 항상 점을 쳤고, 매 컬렉션마다 고향인 ‘그랑빌’이라는 명칭의 코트를 포함시켰고, 한 모델에겐 백합다발을 들게 했습니다. 그에겐 또 피에르 가르뎅과 이브 생 로랑의 애제자가 있었습니다. 이브생 로랑은 1957년 디올 가을 컬렉션에 많은 의상을 선보였는데 당시 35세. 이 외 이브생 로랑의 정보는 따로 포스팅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컬렉션 후, 디올은 이탈리아에서 휴식취하는데 열흘 후 휴양지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52세. 생을 마감합니다. 디자인 박물관의 인물 소개에 따르면 그의 죽음은 생선뼈가 목에 걸린 후 심장 마비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타임》의 사망 기사에서는 카드 게임을 하던 중에 심장 마비로 죽은 것이라고 보도 했습니다.


(왼)1950년 모델과 함께한 디올 (오)1995년 파리 디올 패션쇼
출처:vv-mag

그는 10년간 짧지만 강력한 인상을 패션계에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가 떠난 후 메종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여러 수석 디자이너에 의해 디올은 명품으로 자리매김 합니다.



레이디 디올
출처:(왼)springstory11 (오)kdcblog.tistory (아래)stylem.mt

그중 크리스찬 디올의 레이디 디올백은 1995년. 프랑스 퍼스트 레이디인 마담 시라크가 영국 황태자비였던 다이애나비에게 선물로 디올에게 가방의뢰를 했고 탄생했습니다. 다이애나의 백이란 뜻으로 ‘슈슈’라는 이름에서 ‘레이디 디올’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이 가방은 18세기 프랑스 황실에서 사용하던 의자패턴을 크리스찬 디올의 감각으로 재해석해 만든 가방이라고 합니다. 마름모꼴’까나쥬’패턴을 가방의 기본 바탕으로 사용한것입니다. 디올엔 의류, 향수,가방 외에도 Christian Dior의 로고 C와 D를 사용하거나 Christian Dior 전체를 새긴 악세사리등 다양한 상품이 있습니다. 디올은 루이비통처럼 LVMH애 속합니다.



(위)디올 본점 프랑스 몽테뉴 거리 (아래)디올 선글라스외 제품
출처:(위)yunkyung.egloos (왼)madeinitaly-e.com (오)kaidow.tistory

참조: 패션의 탄생. 구글.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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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하면_______이다.
샤넬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게 뭔가요? No.5? 트위드 슈트? 퀼팅 백? 진주목걸이? 샤넬이 명품이 되기 까지의 변천사를 알아보겠습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가브리엘 샤넬은 어린시절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떨여저 고아원에서 동생과 생활합니다. 하나뿐인 가족 동생마저 병으로 사망합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18살에 보조 재봉사와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꾸려 나갑니다. 샤넬이 부르던 노래중 ‘코코리코’가 있는데 그 덕에 사람들은 ‘코코’라는 별명이 생기게 됩니다.


(왼)샤넬 (오른쪽)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모자와 샤넬 모자
출처:(왼)blog.sktworld (오른쪽)it.co.kr

샤넬 인생은 많은 남성들의 도움과 사랑이 많이 차지 한다고 해도 가언이 아닙니다. 그 중 첫번째. 가브리엘의 인생 전화점을 주게 되는 한 신사. 에티엔 발장. 발장의 구애로 25살에 그의 정부가 되어 사교계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당시 유행하던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승마복을 리폼에서 입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류층 스타일이 패션 브렌드던 시절. 많은 창부와 정부들은 상류층을 따라 하며 그들과 같아 보이게 했었는데요. 샤넬의 의상은 당연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죠? 샤넬은 발장과 어울리며 상류 문화에 대해 습득해 나가면서, 자신의 패션 감각을 살려 디자인도 했습니다. 그 중 제일 먼저 선 보인 것이 모자. 귀부인들에게 모자가 인기를 끌면서 1908년 샤넬은 자신만의 모자가게를 엽니다. 모자 가게 오픈한 샤넬을 위해 발장은 그녀에게 사업가로 성공한 지인 카펠을 소개해줍니다.


샤넬과 카펠
출처:(왼)artinsight(오른쪽)shezcom

친구를 함부러 여인에게 소개해주면 안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건 아닐까요? 샤넬과 카펠은 비슷한 인생관으로 서로에게 끌리게 되며, 결국 샤넬은 발장을 떠납니다.

1901년 두번째 남자 카펠의 후원으로 파리 캉봉 거리 21번지에 파리의 모자 디자이너 ‘샤넬 모드’를 열면서 인기를 얻습니다. 화려한 모자가 많았던 곳은 샤넬의 심플한 디자인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모자로 유명세가 된 샤넬은 의류 패션에도 손을 댑니다. 당시 코르셋과 불편하지만 화려한 옷이 유행이던 스타일이 샤넬에 의해 바뀌게 됩니다.


(왼,중앙)코르셋 (오른쪽)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옷(화이트드레스)에서 샤넬이 디자인한 옷(흑백)
출처:(왼)채널 뉴스 (중앙)위키피디아 (오른쪽)it.co.kr

불편한 코르셋은 없어지고,긴 스커트도 무릎 길이까지. 샤넬은 시대 흐름도 파악하고 있던 걸까요? 여권 신장 운동으로 1910년 부터 1920년대의 트렌드를 샤넬이 장악합니다.
그녀를 후원하던 카펠은? 세계1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 진출을 위해 영국 귀족과 결혼하고 맙니다. 인생관과 서로의 사랑도 결국 명예를 이길 수 없는 것일까요? 하지만 카펠은 결혼 후에도 샤넬을 만났고, 결국엔 이혼 하고 다시 샤넬과 함께합니다만… 누군가를 불행하게 한자는 결국 끝까지 행복하지는 못한건가요? 1919년 카펠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맙니다. 그 후 그녀는 일에 몰두 하며 1921년 쿠튀리에 인정을 받으며 샤넬 오트 쿠퀴르 하우스를 뤼 캉봉 21번지에 설립합니다.


(왼)마릴린 먼로 (오)샤넬 No.5
출처:(왼)neurotics.egloos(오른쪽)myjlook

고객이 많아지면서 VIP도 생기게 됩니다. VIP고객을 위해 만든 향수가. 그 유명한 NO.5 마린린 먼로의 잠옷 NO.5하면 가장 유명한 설이 있죠? 잠잘 때 무엇을 입냐는 질문에 마릴린 먼로는 “전 샤넬 넘버5라고 대답했죠. 누드라고 말하긴 좀 그렇잖아요?” 수 많은 숫자중에 왜 NO.5? 제조자가 10번까지 샘플을 만들었는데 그중 5번을 선택을 해서 No.5가 탄생. 그것 말고도 컬렉션이 5일에 열려 행운의 숫자로 여겨 NO.5라는 설도 있습니다. 정말 단순한 작명 실력이죠? ^^; 이 향수는 고객 선물용으로 제조 되었지만 고객들에게 인기가 많아져 1921년에 샤넬 NO.5가 출시 됩니다.


리틀 블랙 드레스
출처:Vingle image


(왼)당시 샤넬 진주목걸이 (오)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샤넬 목걸이
출처:(왼)pdtaeng.tistory (오)google image

장례식에만 입던 검정옷을 세련되게 샤넬만의 스타일로 만든 것이 1926년. ‘리틀 블랙 드레스’ LBD(Little Black Dress)라고도합니다. 처음에 꺼리던 블랙 드레스는 곧 유행 합니다. 블렉드레스를 처음 선 보였을때 ‘보그’에선 “become a sort of uniform for all women of taste” 다양한 취향을 가진 모든 여성을 위한 일종의 유니폼이 될것이다.

그 후에 샤넬의 전설적인 아이템. 샤넬 슈트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샤넬손에 거친 진주 모양 악세사리는 더이상 보석이 아닌 장식품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샤넬 상징 중 하나이던 진주목걸이는 모조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전 이번 포스팅 자료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나중에 소개할 백도 원래는 서민층으로 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샤넬은 에르메스, 루이비통처럼 처음부터 상류층을 타겟으로 만든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에르메스와 루이비통 관련 정보는 아래로고를 클릭해주세요^^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루이비통'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에르메스'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모조품 진주 악세사리처럼 우리가 샤넬에 대해 착각하는 것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샤넬 상징 꽃 입니다. 얼핏 보기엔 장미 같고, 많은 분들이 장미로 알고 계시지만. 사실 그 꽃은 동백꽃. 카멜리아 입니다. 자랑, 겸손한 마음의 꽃말을 가진 이 꽃은 샤넬이 가장 좋아한 꽃이라고 합니다.


(왼)동백꽃 (오)샤넬 화장품
출처:(왼)eagonblog (오)dreamcity.tistory

그녀의 친구는 영국수상. 세계1차대전과 달리 2차 세계대전에서는 샤넬은 1939년 잠시 사업을 접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2차 세계대전에도 찾아옵니다. (물론 2차 세계대전 일어나기전에도 수많은 남자가 있었답니다.) 독일군 나치 장교. 한스 귄터 폰딩클라게. 그와 함께하여 샤넬은 전쟁중에도 위험 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전쟁 후엔 나치 애인이라는 명목으로 잡힙니다. 그녀의 인맥은 어디까지 인가요.. 위스턴 처칠이 친구였던 샤넬. 그가 도왔다는 소문도 있다는데… 얼마후 무죄로 석방됩니다. 무죄로 판명나자 샤넬은 더이상 프랑스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프랑스인들은 샤넬을 매국노라 생각했기 때문에 샤넬의 명성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샤넬 트위드 수트
출처:korea.nomesdesign

샤넬이 없어진 후의 프랑스엔 외국인 디지아너 발렌시아가와 크리스찬 디올과 같은 신 디자이너들이 속출 했습니다. 15년간의 망명생활 후 1954년 71세로 파리에 돌아옵니다. 반겨주는이는 없었지만, 그녀는 컴백을 준비 합니다. 설상가상인가요? 쇼 이후에 사람들은 20년 전과 비슷하다며 냉대했고, 디올이 디자인한 라인있는 옷이 유행합니다. 그 후 샤넬은 절망하지만… 샤넬을 버린 곳은 오직 프랑스. 미국과 영국은 샤넬을 환영합니다. 그녀의 전성기가 다시 온 것이죠. 역시 노력하는 사람에겐 배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반 세기 전에 유행하던 샤넬 슈트는 가슴과 힙이 작은 여성에게 아름답게 보이도록 해주었고, 지금 까지 사랑 받고 있습니다.


(왼)샤넬 퀼팅백 (오)샤넬 가방
출처:(왼)flyairfrance (오)dayzf.tistory

아직 소개 안한 샤넬 고유 명사가 있다구요? 1955년. 퀼팅백 중에서도 첫 백. 2.55 왜 2.55냐구요? 샤넬 NO.5처럼 단순한 이유. 1955년 2월에 런칭해서 2.55라고 합니다. 2.55백 탄생 배경은 항상 손에 쥐던 가방이 불편해서 끈을 연결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어린시절 열쇠 체인을 영감을삼아 만든 것이 이 유명한 퀄팅백입니다. 이런 사소한 곳에서도 영감을 받은 한 사람이 또 있죠? 바로 마크제이콥스의 ‘그레피티’백입니다.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그레피티'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그 후 87세의 나이에도 컬렉션을 준비하다 1971년 사망하고 맙니다. 그녀의 조국 프랑스에는 배신자로 낚인찍혀 묻히지 못하고 스위스 로잔에 묻힙니다. 장례식엔 발렌시아가, 이브 생 로랑 등 패션 거장들이 몰려와 그녀의 죽음을 애도 했습니다. 비록 조국엔 묻히지 못하지만 패션계에서는 한 획을 그은 그녀 샤넬. 샤넬의 수많은 남자들의 후원과 그들로 얻은 영감이 아니였다면 지금 명품 샤넬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가져봅니다. 지금은 가방, 의류, 향수 뿐만 아니라 화장품,악세사리,신발 등 다방면에서 샤넬을 이름을 내건 수많은 상품들이 출시 되고 있습니다.


샤넬 무덤
출처:(왼)위키트리



출처:(위)eyewear.tistory (왼)tiktok798.tistory (오)mad.kr

참조: 패션의 탄생. 구글.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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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비통. LVMH로 넘어가기 전/후
아버지가 목수였던 어린 루이 비통은 원래 목수가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던 루이는 1835년 15세 때 고향을 떠나 파리로 향합니다. 당시 자동차, 기차도 없던 시기. 파리로 가는 길에 식당이나 마구간에서 여비를 벌어 1년만에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가방점 구인광고를 보고 무작정 들어간 루이. 파리에서는 가방점에서 가방 판매 외에도 부유층 짐을 대신 싸주는 일을했는데. 그곳에서 루이는 짐 싸는 일 부터 시작합니다. 가방을 잘 싸 그의 실력은 파리에 유명세가 됬고, 나폴레옹 3세 황실까지 소문이 났습니다.


(왼)루이 비통 (중앙,오른쪽)나폴레옹 3세(1808~1873) 부인 유지니 황후
출처:(왼)위키피디아 (중앙,오른쪽)friend25kr.blogspot

나폴레옹 3세 부인 유지니 황후는 옷을 많이 가지고 다니기로 유명합니다. 다른 나라로 여행 갈땐 300여벌 정도 옷만 가지고 다녔는데, 당시 귀부인이 입었던 옷 한벌이 약 6kg정도라 옷만 약 1.8톤만 가져 다닌겁니다. 옷들을 구겨 지지 않게 도와 준 사람이 루이 비통. 30이 넘도록 루이는 황후의 짐 싸며, 실력을 인정 받으며 황실에 일하던 어느날! 33세. 패커의 일로 가방에 대해 전문가가 된 그는 황후의 후원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여행 가방점을 엽니다.


어린 나이에 홀로 고향을 떠나는 것도 큰 모험이었을 텐데, 그는 어떤 심정으로 떠났는지 새삼 궁금합니다. 당시 잡일에 불과한 짐싸는 일. 사소한 일이라도 열심히,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진다면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지원해주는 누군가가 나타난다. 그 뒤에도 꾸준히 자신의 장점을 키워 열심히 한다면 명품이 된다. 루이 비통이 주는 교훈이 아닐까요? 명품은 정말 아무나 명품이 되는게 아니구나 하는걸 다시 느끼는 계기가 됬습니다.


(왼)당시 여행가방 트렁크 (중앙,오)루이 비통이 만든 트렁크
출처:(왼,중앙)google image (오)parisart.tistory

교통 수단이 발달하면서 부유층이 늘게 되었고, 귀부인들은 여행때 마다 값비싼 옷을 담아 다녔는데, 당시 사진에서 보는것 처럼 위가 둥근 보물상자 처럼 생긴 트렁크는 운반하기 불편한 디자인이었습니다. 1854년 루이 비통은 그레이 트리아논 캔버스로 제작된 사각 형태의 트렁크를 만들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사각 트렁크!. 쌓을 수도 있고 방수 캔버스로 방수도 잘되고, 내부에 칸막이가 있어 효율적으로 정리 할 수 있었습니다. 트렁크로 그는 짐싸는 패커 뿐만아니라 제작자로도 유명세가 되었고, 가게를 오픈한지 5년 만에 공장을 설립했고, 수백명의 직원을 거느렸습니다. 1859년. 아들 조르주 비통에게 사업을 물려주는데, 그는 루이 만큼 아이디어와 솜씨가 뛰어났고, 1867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왼)루이비통2세. 조르주 비통 (오)루이비통3세. 가스통 비통
출처:pandalouis.tistory

파리 세계 박람회 하면 누가 또 떠오르지 않으세요? 얼마전 포스팅한 에르메스. 1867년 티에리 에르메스가 1등. 그의 아들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1878년에 수상. 그러면 루이 비통 아들 조르주 비통과 티에리 에르메스는 같은 박람회에 함께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거둔거로군요!!
에르메스 관련 포스팅은 아래 에르메스 상표를 클릭해주세요 ^^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에르메스'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인기가 높은만큼 당시에도 루이 비통은 모조품 많아 조르주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1872년 첫 모조품 방지를 위해 줄무늬 트렁크가 탄생했습니다. 조르주 비통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실용적인 여행가방을 만들었고, 프랑스를 넘어 영국, 미국에도 고객이 생겨, 1885년 런던과 뉴욕에 매장을 오픈하면서 전 세계로 사업을 확대 해 나갔습니다.


(왼)디미에 (오)모노그램
출처:google image

하지만 다시 모조품이.. 또 다시. 모조품을 방지 하려고 두번째 모조품 방지. 1988년 ‘다미에’ 패턴을 선보입니다. ‘다미에’는 현재의 루이 비통의 시그니처 패턴! 그 당시 19세기 귀족 사회 영향으로 명품브랜드가 되어 모조품이 많이 생겼던 것입니다. ‘다미에’패턴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모조품으로 고생하여 이번엔 아버지의 머릿글자 L과 V를 따서 마지막 세번째 모조품 방지.1896년 오늘날 루이 비통의 상징 모노그램이 탄생한 것입니다. 조르주는 더 이상의 모조품을 방지하고자 상표등록까지 했고, 그 뒤의 모조품은 모두 고소 합니다.


출처:(왼)google image (오)news.zum

그 후 조르주는 모노그램을 활용해 주전자와 찻잔을 넣을 수 있는 티 세트 트렁크, 타자기를 보관 운반 할 수 있는 트렁크를 만들었으며, 여행자들을 위해 가방 주인 이니셜을 새겨주었습니다. 획기적인 디자인과 실용적 여행가방으로만으로 명품은 될 수 없겠죠? 여행가방에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내구성!. 그는 가방 실험을 위해 직접 가방을 들고 실험에 나섰습니다. 루이 비통 가방은 현재까지도 그 장인 정신과 내구성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샹젤리제 거리
출처:(왼)google image(오)럭셔리

파리의 서쪽 지역은 점차 발전했고, 1914년 루이 비통은 현재 본점인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로 이동 했습니다. 루이 비통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귀족들은 더 많이 찾게 되었고, 1940년 2차 세계대전에서도 사그라 들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샤넬도 이 시기에는 문을 닫게 되는데 말이죠. 독일이 파리에 쳐 들어왔지만 독일은 이미 루이 비통에 매료 되있었기에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 후, 시대는 더이상 딱딱한 트렁크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당시 자동차가 탄생하던 시기였기 때문 입니다.


(왼)노에 (오)파빌론
출처:google image

시대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소프트 백을 만들지만, 민무늬는 인기가 없었고, 모노그램천은 너무 두꺼워 난간에 부딪힙니다. 조르주의 아들은 부드러운 모노그램 캔버스를 만들어 1932년 가스통은 첫 번째 소프트백 ‘노에’를 탄생 시킵니다. ‘노에’는 면에 비해 부드럽지 못했고, 1959년엔 면과 같은 소재로 모노그램을 완성. 1966년엔 ‘파빌론 백’ 탄생.


(왼)'에피' 라인 (오)베르나르 아르도
출처:(왼)google image (오)위키피디아

소프트 백은 트렁크에 비해 저렴하고 편해 그 인기는 아시아 까지 넘어 왔습니다. 일본에 들어온 루이 비통은 너무 비싸 일본 사람들이 프랑스 까지 가게 된 사태. 1978년 루이 비통은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 매장을 오픈 했고, 1985년엔 ‘에피’라인을 런칭하면서 성공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위기는 찾아오는 법이죠? 1980년 사람들의 취향이 더욱 다양해 지면서 뤼이비통은 촌스러운 브랜드로 낙인되면서 가족경영이 힘들어 졌습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프랑스 국립 행정학교를 졸업한 ‘베르나르 아르도’ 그는 루이 비통만 아니라 명품 브랜드가 힘이 없을때 집어 삼키는 명품 사냥꾼. 하지만 다 망해가던 루이 비통은 그의 경영으로 예전가치에 비해 더 뛰어난 세계적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왼)마크 제이콥스 (오)마크 제이콥스와 그래피티
출처:(왼)구글 (오)s20.co.kr

(왼)2013 s/s 마크 제이콥스 (오) '베르니'라인
출처:(왼)blogdegalleria.tistory (오)pursevalley.blogspot.

(왼)무라카미 다카시 (오)모노그램 멀티 컬러
출처:(왼)yamatinen다음블로그 (오)구글

1997년 루이 비통 새 아트디렉터 ‘마크 제이콥스’가 되면서 의류라인을 출범했고, ‘베르니’라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래피티' 또한 마크제이콥스가 탄생시켜 인기를 얻었습니다. 일본인 아티스트 타카시 무라카미와 콜라보레이션으로 모노그램 멀티 컬러를 론칭했습니다.


(왼)루이 비통5세. 파트리크 루이 비통 (오)핫스탬핑
출처:(왼)news.zum (오)관세청블로그

루이 비통의 자손들은 어떻게 됬을까요? 경영은 이미 넘어갔지만 제조 기술자로 특별 주문 제작과 홍보를 맡고 있다고 합니다. 젖병 케이스, 케이크 상자 같은것이 이에 속하는 것이죠. 백년 전과 같이 이니셜 새기는 서비스는 여전하고, 왕족들이 주문 제작 하듯 고객 맞춤 제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행가방과 가죽 소품에 무료로 시그니처 새겨 주는 ‘핫 스탬핑’, 맞춤 가방’스페셜 오더’, 모노그램 패턴에 원하는 색상과 이니셜 넣는 ‘몽 모노그램’
한 예로 김연아 스케이트 가방이 있죠? 포스팅 참조 하세요^^ 아래 김연아선수의 스페셜 오더 스케이트 트렁크 클릭!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스페셜 오더'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2013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색상으로 S/S광고 촬영했습니다. 뉴욕은 도시 상징 옐로우캡(택시)으로 노랑색. 파리는 시의 상징색인 자유의 파랑색. 블루. 상하이는 중국의 부와 행운을 상징하는 빨강색. 레드를 선택합니다.



출처:glamourboysinc.com
참조: 패션의 탄생.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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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에리 에르메스 시작으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된 에르메스
샤넬, 디올, 버버리 등 명품에 비해 에르메스는 역사와 전통이 매우 깊습니다. 가족경영으로 이어가는 유일한 명품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티에리 에르메스
출처: hulax 다음 블로그

1801년 티에리 에르메스. 에르메스 창시자가 태어납니다. 그는 파리에서 꼼꼼하게 만든 마구용품으로 인기를 얻습니다. 티에리만의 장인정신으로 마구상들 중 독보적인 가게로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티에리 에르메스는 장인정신을 인정받아 1등을 차지 합니다. 1878년 박람회에선 티에리 아들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수상을 하게 됩니다. 그 후 티에리 에르메스는 1878년 세상을 떠났고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그 뒤를 이어 갑니다. 그는 아버지 뒤를 이어 세계 왕실과 귀족들에게 마구 용품을 납품할 정도로 솜씨를 인정받습니다. 1902년 그는 은퇴하고 두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줍니다.


(왼)에밀 모리스 (오)블리드백(=부가티)
출처: (왼)cukfollow 티스토리 (오)fpasshion.blogspot

둘째 아들인 에밀 모리스!! 이분 이래로 에르메스는 제1의 전성기를 맞이 합니다. 1918년 1차 세계 대전 당시 기마병에 안장을 공급했었는데 그는 사업차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면서 캐딜락을 보게 됩니다. 캐딜락 후드에 달린 지퍼를 보고 자동차 외의 독점권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에르메스는 프랑스에 지퍼를 최초로 들어오게 했고, 세계 최초 지퍼백을 만드는데 그 이름은 “볼리드”입니다. 자동차 브랜드인 부가티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자동차 여행용 백이 탄생합니다. 그래서 볼리드 대신 부가티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볼리드 백의 특징 중 하나는 정면 타원형 안에 여행용 가방 목적에 맞게 고객 이름을 새김니다.



(왼)필레 드 셀 (오)에르모토
출처: luiner 티스토리

1920년 미국 여행 중이던 모리스는 자동차 회사 포드를 방문하면서, ‘이젠 마차가 사라질꺼야. 자동차, 배, 기차의 시대가 오겠지’ 시대 변화를 감지한 에르메스는 마구 용품에서 여행과 생활용품으로 중요 품목을 바꿔 가방, 벨트, 장갑에 이어 의복과 손목시게, 자동차 소품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를 넓혀 갔습니다. 에르메스는 공장의 대량생산 체제에 굴복하지 않고 전통적인 수작업과 소량 생산 주의를 고집합니다. 그 중 가죽 제품 작업시 안장을 꿰맬 때 쓰던 독특한 박음질 새들 스티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에르메스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제품의 희소성으로 대중들에게 동경을 받기 시작합니다. 전통을 지켜나가고 싶던 에밀 모리스는 1927년 ‘필레 드 셀’ 이라는 팔찌를 선보입니다. 이 팔찌는 가죽 스트랩에 말 재갈 모양의 실버 장식을 단 에르메스 정통 오리지널 팔찌. 시계의 탄생은? 딸 재크린에게 시계를 만들어 선물한 에밀 모리스가 시계를 만들어 딸 재크린에게 선물했는데, 이 시계가 큰 호응을 얻으며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1928녀 슬라이드 바방식의 가죽 덮개를 만든 첫 시계 '에르모토’가 탄생 합니다. 당시 골퍼들에겐 손목시계는 불편했고, 에르메스는 벨트 시계를 선보인 것입니다.


(왼)카레 (오)샹 당크르 디자인 팔찌
출처: luiner 티스토리

스카프 라인은 어떻게? 우연히 만난 군인의 손수건을 본 것이 시초로 실크 장인들이 많던 프랑스 리옹에 스카프 공장을 건립하고 스카프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1937년 에르메스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국제 박람회에서 에르메스의 첫 실크 스카프 '카레' 를 론칭하여 큰 주목을 받습니다. 카레는 불어로 정사각형을 뜻합니다.


스카프의 이름은 ‘주 데 옴니버스 에 데 담 블랑시’ 모두를 위한 게임과 햐얀 옷의 숙녀 라는 뜻. 가로 세로 90cm. 정사각형. 에밀 모리스는 아들이 없었고, 사위가 있었는데. 그는 건축가가 꿈이었지만 에르메스를 위해 일합니다. 취미가 수석 수집이었던 그는 자주 바닷가를 산책 했는데, 우연히 닻과 쇠사슬을 발견하고 팔찌를 만들었습니다. 팔찌외에도 ‘샹 당크르’ 디자인은 에르메스 제품 전체에 퍼져나갔고 클래식한 아이콘으로 자리잡습니다.


출처: 오피스 티스토리

1939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에르메스 제품은 부드러운 크림색 종이 상자였습니다. 하지만 전 쟁 후 상자를 구하기 어려웟는데 당시 이름도 없는 오렌지 상자뿐. 오렌지 색은 금기된 색, 저주받은 색, 천한 색으로 취급됬지만 에밀 모리스는 이를 다르게 생각 했고, 오렌지색 상자는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시그니처 아이템이 됩니다.


출처: fpasshion.blogspot


(왼)모나코부부. 오른쪽 모나코 왕비. 켈리백이 유명해진 사진 (오)켈리백(=프티 삭 오트)
출처: luiner 티스토리

1951년 수 많은 명품을 만들어 내고 티에리 에르메스는 사위에게 에르메스를 물려주고 생을 마감합니다. 로베르는 우선 로고를 만듭니다. 마차시작된 에르메스. 말과 마차, 기수가 표현된 로고가 탄생하게 됩니다. 로베르는 수많은 실크 스카프를 만들고 1956년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가 임신한 배를 가리기 위해 든 핸드백 ‘프티 삭 오트’가 유명세가 되면서 의도치 않은 마케팅효과를 얻었고, 켈리에게 허락 받은 뒤 켈리 백이라 칭하게 됩니다.


(왼)제인 버킨 (오)켈리백
출처:(왼)qluiner (오)luiner 티스토리

하지만,뛰어난 명성과 성장 중에 인조신소재가 인기를 얻게 되면서 1970년 침체 됬는데 1978년 로베르가 사망하고 그 의 아들 장 루이 뒤마가 경영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 합니다. 당시 중년층에게 인기 있던 에르메스는 소비자 층을 확대 했고, 우연히 비행기에서 만난 여배우 제인 버킨이 에르메스백의 수납 불만이 시발점으로 그녀가 디자인한 제품이 버킨 백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왼)버킨백 (오)빅토리아 베컴
출처:fpasshion.blogspot

버킨 백은 기계로 만들어 지는 가방이 아닌 장인의 손으로 제작하는데 그 과정일 이렇습니다. 3년간 가죽 장인 학교를 다니고 2년간의 수련. 악어 가죽은 오직 최상품. 18시간 동안 만드는 가방으로 일주일에 2개 밖에 생산을 못합니다. 이렇게 생산된 가방은 고객 수선 요구시 그 당시에 썼던 가죽을 그대로 사용해 수선을 할만큼 꼼꼼하고 세심한 작업을 합니다. 버킨 백의 가격이 몇천 만원까지 올라간 이유죠. 힘들게 탄생하는 가방인 만큼 그 수량이 많지 않아 고객들은 대기 명단에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버킨백 소유주는 빅토리아 베컴! 버킨 백의 탄생 이후 1987년 에르메스는 150주년을 맞이했고, 1990년대 세계적으로 명품 산업.


(왼)장 폴 고티에 (오)크리스토프 르메르
출처:(왼)imagnet (오)럭셔리

2003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장 폴 고티에, 2011년 S/S 컬렉션 이후 라코스테 디자이너 크리스토프 르메르가 그 뒤를 이었고, 경영문제에는 LVMH가 손길을 뻗었지만 여전히 가족경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조: 패션의 탄생.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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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가 가방 탄생 배경?!
영국의 배우이자 가수인 샤를로트 갱스부르를 아시나요? 프랑스의 샹송 가수이자 영화배우 제인버킨과 세르주 갱스부르 사이에 태어난 딸 입니다. 마크 제이콥스가 이 부부 집에 놀러를 갔는데 칠이 군데 군데 칠이 벗겨지고 딸 갱스부르가 검은 펜으로 마구 낙서해 놓은 낡은 루이비통 트렁크를 발견했습니다. 이 트렁크를 보고 낙서같은 글자 프린트가 들어있는 루이비통 그래비티 탄생 배경 이라고 합니다.


Wow . 한 아이의 장난으로 영감을 받은 마크 제이콥스와 낙서를 하던 그 아이가 성장해 영국의 배우이자 루이비통 아티스틱 디렉터인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뮤즈가 되었습니다.

 

(왼) 샤를로트 갱스부르 (오) 루이비통 그레피티를 들고 있는 마크 제이콥스
출처: opusyonsei.tistory

*니콜라스 제스키에르는 마이 제이콥스 뒤를 잇는 루이비통의 아티스틱 디렉터입니다. 26살때 발렌시아가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어 15년간 발렌시아를 이끌었습니다. 알렉산더왕이 발렌시아의 새 수장이 되면서 LVMH가 평소 눈여겨 본 니콜라스 제이키에르는 루이비통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
출처: 패션스타

영감을 받아야지 생각해야지 보다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이디어를 내려고 머리를 싸매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스트레스 받는 것 보단 머리를 식히면서 주위를 둘러 보시면서 여유를 찾아 보시는건 어떨까요? 마크제이콥스처럼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마크 제이콥스
출처: retro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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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치 코트는 우비
트렌치(Trench)는 '도랑' ‘참호'의 뜻으로 적의 탄환으로 부터 몸을 보호 하는 참호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명품 브랜드 버버리 설립자인 토머스 버버리가 군인을 위한 레인 코트를 제작하면서 버버리의 대명사 프렌치코트가 생기게 됬습니다.

출처: Google Image

1차 세계대전 때 참호 안에서 영국군 장교가 착용한 우비에서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 후에도 전쟁터에서 자신을 지켜준 코트를 버리지 않고 전쟁용 외투였던 트렌치를 레인코트로 입었습니다. 남자만?! 이젠 여자들도 스타일리쉬하게~ 그 당시만 해도 남자들만 입었지만, 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는 여성들도 입는 대중적인 패션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다양한 디자인으로 캐주얼한 아이템은 물론 정장과도 잘 어울림과 동시 체형을 슬림하게 보여주는 효과까지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트렌치 코트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우선 트렌치코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a. Chin Flap: 단추를 이용해 비바람 막는데 덮개.
b. Stom Flap: 비바람을 막기 위한 오른쪽 어깨 위에 덮는 천.
c. Equualette: 총, 쌍안경을 매기 위한 견장.
d. D-Ring: 수류탄, 칼, 수통을 부착하기 위한 고리.
e. Cuffs Strap: 풍우를 막기위해 소매끝을 조이는 벨트로 2개의 단추로 넓이 조절 가능.
f. Slotted Pocket: 기다란 구멍이 나 있는 일자형 주머니.
g. Inverted Pleats: 주름의 솔기를 맞닿게 하여 안쪽에 맞주름을 잡은 역 주름.
h. Wind Pand: 스트랩 모양 천으로 단추로 여며 바람을 막아주고 펄럭임 방지.
i. Cape Back: 비를 가장 많이 부위에 물기 스며드는것 방지 위해 2중천.

참조: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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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리바이 스트라우스 (오)제이콥 데이브스
출처: Google Image
1850년대 골드러시를 따라 미국 서부에 온 독일 출신 이민자 리바이 스트라우스. 광부에게 천막이나 포장마차용 질긴 천을 팔기 위해 캘리포니아 금광에 찾아온 그는 광부들이 천막보다 거친 일을 견대낼 질긴 옷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슴까지 올라오는 작업용 오버롤을 만들었습니다. 1880년대 말 청바지를 부르는 명칭은 '웨이스트 오버롤스', 청바지의 인기로 천이 부족해지자 리바이는 프랑스 남부의 님(Nimes)지방에서 질긴 작물을 들여왔습니다. 이 직물은 서지 드님(님 지방의 옷)이라고 불렸고 여기서 ‘데님’이라는 명칭이 유래했고, ‘진(Jeans)’이라는 말은 이탈리아 제노아 (불어로 Genes)항에서 온 선원들이 청바지 작업복을 입은 데서 유래했습니다.

(왼)구리리벳 (오)"말 두필이 양쪽을 잡아 당겨도 끄덕 하지 않아요" 광고
출처: Google Image
그리고 리바이스 청바지에 또다른 위인 제이콥 데이브스가 있습니다. 그는 작은 양복점 했고, 리바이의 가게에서 전기적으로 범포와 천막용 천 주문을 했었습니다. 그의 고객들 중 '옷이 튿어진다.' 바지 앞쪽 주머니가 시작되는 허릿단과 옆션의 이음새가 문제였던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탄생한게 구리리벳! "말 필이 양쪽을 잡아 당겨도 끄덕하지 않아요."
하지만 특허 할 돈이없어 리바이에게 편지를 썼고, 리바이는 제이콥을 불러 공동으로 특허 신청서 작성, 재단사로 채용했습니다. 의복 주머니 보강에 금속 리벳 사용 특허 신청서는 번번히 기각되었지만 1873년 리바이 마침내 특허를 따냈으며 독점 판매권을 가졌습니다.

레드탭
출처: Google Image
1936년, 모든 제품 오른쪽 뒷주머니에 자그마한 빨간색 상표를 부착했습니다. 옷 바깥에 붙는 최초의 상표, 리바이스. 이 빨간상표가 여러분이 리바이스에서 늘 보는 레드탭 입니다. 레드 탭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품질 관리를 거친 제품임을 보증하는 표식으로, 레드탭은 구리리벳, 가죽 패치, 아치 모양의 박음질과 함께 리바이스를 대표 합니다. 1950년 제2차 세계대전 뒤 대량 생산 대량 소비체제로 변하면서 실용적인 아이템에서 카이보이, 배드보이 이미지를 얻게 되고 자유를 갈망하는 젊음이들을 상징하게도 되면서 점차 보보스 [부르주아 + 보헤미안 (정통을 비웃던 자유주의자, 예술가, 지식인)] 등 사회변화 속에서도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리바이스 라이벌
리바이스와 함께 진 브랜드의 양대 산막인 ‘리(Lee)'는 1889년 설립 하였습니다. 설립 초엔 음식관련 업체였으나 1924년 첫 ‘리 카우보이 팬츠’ 카우보이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졌고 1926년에는 세계 최초로 기존의 앞트임 단추를 지퍼로 교체한 청바지를 만들면서 Lee도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또 현재의 ‘랭글러’(1943년 블루벨이 회사명 바꿈)인 다른 라이벌 ‘블루벨'은 1904년 빨아도 줄지 않는 샌포라이즈드(Sanforized) 천을 사용한 오버롤스 개발하면서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왼)Lee (오)Wrangler
출처: Google Image
청바지가 빨간색이었다면? 왜 청바지?
태생이 ‘노동자들의 작업복’ 리바이가 뱀을 피해 일하는 광부들을 위해 인디고 블루로 염색한 바지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1498년 바스코다가마 인디고를 얻을 수 있는 뱃길을 발견한 뒤 청색은 인디고 덕에 세계 어디서나 염색할 수 있는 색이었고, (인간의 오줌으로 발효시켜 사용하는) 인디고는 값쌋으며, 인디고로 염색한 직물은 햇볕에 잘 바래지도 않았고, 거친 노동에도 때가 타도 티가 잘 나지 않았습니다. 이외 여러 이유로 청색은 중세이후 값싼 옷의 가장 흔한 색이었습니다.


즉 청색은 청바지가 탄생 전부터 서민의 의복 대표색상이 되었고, 1930년 미국 사회학자 업튼 싱클레어가 사무직 노동자를 통칭하는 화이트칼라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이에 반대된느 개념으로 육체노동자를 통칭하는 블루칼라 자연스레 생기게 됩니다.

인디고. 라틴어 indigo(쪽)과 fero(있다)의 합성어. 쪽에서 염료를 취함.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청바지 가격은?
2001년 우리돈으로 약 6000만원 1998년 네바다 광산 진흙속에 묻혔다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바지는 리바이스가 구매했습니다.

(왼)가장 오래된 청바지 (오)리바이스 슈퍼볼진
출처: Google Image
세계에서 가장 비싼 청바지?
리바이스 슈퍼볼진 - 15만 달러로, 2003년에 리바이스 탄생 15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60년 전통을 자랑하는 브라질의 보석 제조회사 'H-Strern’이 최고급 장인으로만 구성된 보석 세공팀과 리바이스 본사의 시그니처급 디자이너로 구성된 특수 제조팀을 동원해 2개월 걸쳐 제작하였고, 세계에 한 장만 존재한다는 희소성으로 옷 가격만 85000달러, 최고급 다이아몬드와 루비, 백금, 등 귀금속으로 세공되어 65000달러 총 15만달러의 가치를 지닙니다.

참조: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 에디터 T의 스타일 사전, 네이버,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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